영국의 크리스챤 작가인 C. S. Lewis는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마치 태양이 존재한다는 것을 믿는 것과 같다. 이 말은 태양의 존재만을 믿는 것이 아니라 태양을 통해 다른 모든 것을 보기 때문이다.” 아마 우리 중에 태양이 존재한다는 사실 하나로 만족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태양을 통해 우리는 셀 수 없는 유익을 얻기 때문이다. 태양의 존재와 이로 인한 유익은 서로 떨어질 수 없는 관계이다.
C. S. Lewis가 신앙을 태양으로 비교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즉 신앙을 가진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은 우리의 삶과 떨어질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이다. 즉 믿는다는 것은 믿는 것을 그대로 살아내는 것이다. 매일 직장을 다니지 않으면 렌트비, 음식, 및 자녀들을 양육하는 비용이 없어 살아갈 수 없는 암담한 현실, 그리고 예기치 않는 교통사고와 병으로 인해 약해진 나의 건강, 나의 의지와 상관없는 어려운 경제 상황, 불가능처럼 보이는 집 마련과 경제적 성공, 그리고 참담한 전쟁과 갈수록 심해지는 자연재해로 인한 인명 피해, 등 이런 모든 일들은 나의 믿음과 어떤 관계가 있는가?
나의 믿음으로 인해 세상은 좀 더 나아지고 있는가? 그러면 내 개인적인 삶은 어떤가? 믿음으로 인해 나아지고 있는가? 아니면 반대로 믿음으로 인해 내 삶은 더 나빠지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믿음과 삶은 같이 갈 수 없는가? 믿음은 믿음이고, 삶은 삶일 뿐일까? 내 삶이 더 나아지지 않으면 믿음생활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그래도 계속 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믿음을 떠나야 하는가? 아니면 이 현세에서는 답이 없고 내세에서만 답이 있는가?
믿음과 삶의 연관성에 대해 깊은 고민을 했던 대표적인 인물은 구약 성경의 ‘욥’이다. 뜻하지 않는 고난으로 인해 욥은 한 마디로 자신의 믿음과 삶을 돌아본다. “내가 왜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 욥의 친구들은 욥의 고난의 문제를 욥의 책임으로 돌렸고, 욥의 아내는 하나님을 ‘부인하라’(deny)는 세속적 충고를 했다. 즉 믿음은 우리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된다는 의미였다.
‘Orthodoxy’라는 말은 두 개의 의미가 들어있는 단어이다. ‘Ortho’는 ‘똑바로, 바르게’라는 의미가 있고, ‘doxy’는 ‘영광, 예배’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기독교 전통에서 “인간의 삶의 목적,” 혹은 “인간이 바르게 사는 삶은 바로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왔다. 진정한 믿음은 내 삶의 현실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욥의 자기 중심적 믿음은 자신의 삶에서부터 시작되었기에 ‘왜 내가 고난을 받아야 하는가?’하는 질문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그러나 욥은 결국 마지막에 하나님 중심적 믿음으로 돌아왔다. 자신이 던진 질문을 하나님 앞에 철회를 했다. 그리고 믿음은 자신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함을 깨닫고 자신의 믿음과 삶이 하나되는 은혜를 경험하게 되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그리고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모든 삶의 자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
즉 지금 우리 앞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고백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께 영광과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고, 이 때 우리는 믿음과 삶이 하나됨을 욥처럼 고백하게 된다. 그래서 믿음은 이해가 아니라 고백이다. 자신을 노예로 팔아버린 형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요셉, 그러나 그 모든 과정들이 자신과 자신의 가정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향해 가고 있다는 믿음이 결국 요셉을 일으켰고 살렸던 것이다.